제목[이창복 칼럼] 지학순 주교님을 추모하며2022-03-14 15:14
작성자 Level 10

<이창복 칼럼>

지학순 주교님을 추모하며

 

고문/615남측위상임대표의장

 

올해가 2021년이다. 지학순 주교님께서 탄생하신 지 백년이 되는 해이다. 평안북도 중화군에서 태어나셨다. 지주교님은 1968년에 천주교 원주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신 이래 가난한 교구민의 희망이며 정의 구현에 앞장서 계셨다. 주교님을 추모함에 있어 극히 제한적인 측면에서 회상하게 됨을 양해를 구한다.

 

지주교님과의 접촉은 1960년대 원주 원주청소년 자활대를 지원해 주시면서 이루어졌다. 주교님께서는 원주교구장직에 계시면서 서울에 있는 노동단체와 연관하여 역할을 하면서 유신치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위하여 방패 역할을 해 주셨고 정의와 평화를 강조하시면서 유신정권의 부당함을 외쳐 주셨다.

 

주교님은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 총재주교가 되셔 평신도 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때가 바로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탄압이 가중될 즈음이니 가히 회원들이 주교님에 대한 기대가 컷 음을 알 수 있다. 주교님은 신구교 에큐케니컬 운동을 지향하고 있는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회장을 맡으셔서 신구교 액션 단체를 결합하여 더 큰 저항조직을 이끄시기도 했다. 또한 원동을 비롯한 고통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복지를 도모하는 한국 노동자 복지 협의회회장을 맡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시기도 했다.

 

한편으로 한국 노동자교육협회장으로서 노동자 권익을 옹호 받기 위하여 노동자 교육을 실시하고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시기도 했다.

 

1970년대 일 이었다. 한국노사 협회가 주선한 세미나에서 버스 차장의삥땅 문제가 죄인가?”하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였는데 지주교께서 열악한 임금을 받고 고생하고 있는 가운데 이루어지는삥땅은 죄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셔서 노동계나 경영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사례가 있었다. 당시 버스 여차장의 삥땅은 사회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기업주는 혹사와 착취로 노동자들을 시달려 왔고 그들은 대변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윤리적, 종교적 판단을 내려주신 것이다.

주교님의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는 각별하였다. 주교님의 환갑 때의 일이다. 환갑 축하 미사를 끝내고 환영 축하연을 하고 있는 데 노동자 한 분을 조용한 곳으로 부르시더니 그 노동자가 방을 얻어야 하는 데 전세금이 없어 걱정하고 있는 점을 아시고 축하금이 들어온 것 중에 600만 원을 주시면서 꼭 전세방 얻는 데 사용하라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는 것을 보고 같이 있었던 동료들이 감격해 하였다.

 

1980년 초반의 일이었다. 정권은 청계피복노조를 극렬하게 탄압하였다. 노조에서는 노동교실을 개설하려고 했던 공안을 탄압하고 모든 간부들을 구속하였다. 그 탄압의 양상을 고발하면서 청계노조의 활동을 보장받는 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이라, 이때 노조 간부들이 원주교구 지주교님을 뵙고자 했지만 출타 중이셔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나중에 지주교님은 그들이 가져 온 문건을 찬찬히 읽어 보시고 크게 분노하셨다. 마침 그날 오후에 주교회의를 개최하였는데 12분의 주교님의 서명을 받았다. 이것이 청계 노조를 위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었다. 여기에 효력을 더욱 증대시키고자 개신교 원로 목사님 12분의 서명을 받아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하였다. 아마도 신구교의 고위 성직자들이 공동으로 문건을 만들어 배포한 예는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1970년대 초의 일이었다. 원주에 범양산업이란 섬유회사가 있었다. 이 회사의 여직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는데 탄압하기 위해 앞장선 노조 조합원들을 모두 해직시켰다. 회사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갈 데가 없으니 원동성당을 찾아와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단식 농성에 돌입하였다. 단식 농성이 1주일 넘기니까 여직원들이 큰일 치를 것 같은 위험한 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되니 지주교님께서 중앙정보부 강원 지부장을 불러 임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원 복직시키기로 하고 문제의 해결을 도모하였다.

 

지주교님은 가톨릭 노동청년회 초대 주교로서 본부 사무실에 방문하신다. 그럴 때면 점심을 노동자들에게 사 주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비록 자장면을 대접하고 있지만 독립운동할 때 독립군의 고통에 참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하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좋은 음식을 사주 지 못해 미안하다는 뜻도 전달되어 모두가 흐뭇해 했다.

 

주교님은 원주에 계시니 서울에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소상히 알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서울에서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박형규 목사, 조화순 목사 등 원주 주교관에서 만찬을 나누시면서 밤새는 줄 모르고 환담하시면서 나라의 형편과 장래에 대한 걱정을 하시곤 했다.

 

여러 가지로 또 오르는 기억들이 있지만 줄이기로 한다. 지주교님에 대한 몇 가지의 기억을 기록해 보았지만 부족한 것이 많고 편향적일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이해하면서 읽어주시기 바라며, 전체적으로 주교님에 대한 느낌을 정리하면서 끝내려고 한다.

 

첫째로 주교님은 행동하는 성직자였다. 다소 급하신 성품에 사랑과 애정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이 많으시고 사리가 분명하였다.

둘째로 주교님은 정의와 평화의 선구자이시고 그러한 세상을 꿈꾸시며 애쓰신 분이다.

셋째로 주교님은 항상 나라 걱정, 민족 걱정, 약자에 대한 애정을 가지신 분이라 평하고 싶다.

 

금년으로 탄생 100주년, 타계하신 지 30여 년이 되지만 오래도록 우리들의 뇌리에 머물러 계심에 감사를 드리며 하늘나라에 영광 속에 항상 계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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