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창복칼럼]미완의 혁명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2017-12-01 18:21
작성자 Level 10

포커스 4.19혁명 50주년
미완의 4월 혁명,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창복 원주시민연대 고문/민주통합시민행동 전국상임대표

*본 글은 3월20일자 참여자치에 실린 글 입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민주혁명으로서 제일 먼저 4.19혁명을 떠올리게 된다. 4월혁명 50주년에 즈음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4.19정신이 잊혀져가고 있으며 또한 오늘의 현실속에서 50년전 사건을 관조해 보는 것은 더욱 필요한 일이다. 

Ⅰ 4월 혁명 이전의 정치 사회상황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등에 업고 출발한 이승만 정권은 자유당을 창당하여 일당독재 장기 집권 준비에 돌입하였으며 사회적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국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있고 민심이 이반되어 있는 중에 3.15불법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① 정치적 정황
1952년 부산피난 국회에서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 종신집권 개헌안을 상정하여 1표차이로 부결 선포했다가 2일 후에 사사오입(四捨五入)하면 통과된 것이라 번복 선포하여 소위 개헌타동을 일으켰다.
1952년에는 야당의원 123명이 내각제 개헌안을 상정하였는데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제공산당의 작당 운운하면서 경찰이 국회를 포위하고 백골단, 딱벌떼같은 깡패를 동원하여 공포정치를 조성하는 등 일당 독재의 전횡을 하였다.
1958년 11월에는 82명의 야당의원을 쫓아내고 128명의 자유당의원만으로 폭력유혈과 통곡의 5시간40분 동안의 국가보안법을 개악했으며
이밖에도 신익희씨를 공신당 통첩자를 낙인찍어 제3세력 운운 한다든지 조봉암 사형집행(1959년 7월), 확정된 법률안을 공표하지 않는 등 다수당의 횡포가 점점 심해졌다.

② 부정비리의 사회상황
생산비도 못되는 자유당 정권의 쌀값 정책으로 농민들의 부채가 증가하였고, 수입비료값을 원가보다 4배 이상 고가로 판매하여 농민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여기에 소위 중석불로 양곡을 구입하여 농민에게 비싸게 판매하고, 양곡의 대일 수출을 자유당 재정부장에게 독점시켜 특혜를 베풀고, 소수특권층에 수백억환의 부정대출하여 특혜를 주는 등 부정과 비리가 속출하였다. 
국민의 눈총을 사고 있는것이 병역비리였다. 권력있고 돈 있는 집의 자제들을 병역을 기피하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들끓없고 정식 세금이외에도 잡부금 종류가 많아 국민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예를 들면 진도군에서는 151개 잡부금 종류로 전국에서 제일 많았고 순창군에서는 80여종이나 되었다. 
이러한 사회환경속에서 “사바사바”라는 속어가 국민간에 회자되었다
국민들은 6법의 기존체계에 무법과 불법을 더하여 8법체계라는 말들이 나돌 정도였다. 한편으로 언론탄압이 심화 되었는데 그 한 예가 1959년 4월 30일에 취해진 경양신문의 폐간조치였다.


Ⅱ 3.15부정선거의 양상
3.15 정부통령선거의 부정사례들을 보면 다양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투표시작전에 4할사전에 투표를 한다든지 3인조(5인조) 강제투표, 공개투표의 강요와 이에 불응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수법, 또는 집단적으로 대리투표를 하거나 또는 기권을 강요하는 등 다양했다.

야당운동원 위협, 다수의 참관인 신고의 접수거부와 신고도있을때 참관인의 입장거부, 내통식 기표식 설치 등 열거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이렇다 보니 투표결과가 너무 많이 나와 감표해서 발표하는 등 웃지못할일이 자행되었다.

Ⅲ 분노의 함성
① 3.15 이전의 데모
1960. 2. 28에 있었던 대구에서 고교의 데모는 4월 혁명의 서막이었다. 이 당시 대구시내 기관장회의에서 자유당 경북도당위원장의 야당집회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강요에 의하여 2월 27일(토)에 있었던 여당 유세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각 학교는 일찍 귀가조치했다.
2월 28일(일)에는 야당유세에 학생들이 참여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각 학교는 등교명령을 내렸다. 
그 등교이후가 학교마다 달랐는데 그 양태를 보면 각 초등학교는 보충수업한다는 핑계로 등교시켰고 대구여중은 영화상영, 경상중은 졸업식 연습, 제일여중은 임시수업, 경북고는 영화관람, 대구고는 토끼사냥, 대구여고는 졸업생송별회, 대구상고도 졸업생송별회, 경북여고는 별 이유없이 12시까지 등교, 경북사대부고는 임시시험, 대구공고는 자체 행사등의 이유였지만 학생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경북고등학생들부터 시작된 2.28데모는 각 학교에 퍼졌고 대구시내 고교생들의 분노가 메아리 쳤다.

3.  5에는  서울의 종로, 광화문, 동대문 등에서 학생과 일반군중이 
          “부정선거 배격하자!”
          “썩은 정치 갈아보자!”등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하였고
3.  8에는 대전고교생들의 데모가 있었고
3. 10에는 대전상고, 수원농고, 충주고 등에서 데모가 있었고
3. 12에는 부산해동고교생들의 데모
3. 13에는 서울시내 곳곳에서 공명선거를 외치는 고교생들의 데모가 
        반도호텔앞, 시청앞, 국제극장앞에서 있었다.
3. 14에는 서울에서 대동상고, 균명고교, 중동고, 강문고, 대동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교생들의 데모가 있었다.
3. 14에는 부산에서는 동래고, 부산상고, 항도고, 북부산고, 영남상고,  
        데레사 여고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인천에서 송도고교생들이, 포항고교생들 데모를 하였다.

② 마산 1차 데모
3. 15 민주당 선거 포기선언과 마산시당간부가 중심이 된 데모는
      자연발생적으로 확대되어 많은 군중이 참여하였다.
      군중들의 누적된 불평불만이 쿠데타가 3.15선거에 투표권을 못받은 사람이 많았고 경찰의 탄압이 더욱 더 시민을 분노케 했다. 이날 데모에서는 사상자가 82명이나 되었다.
3. 16 서울에서는 민주당사 앞에서 500명의 집회를 가졌고
3. 17 서울 성남고생 400여명이 영등포에서 데모를 했고
3. 16 ~ 17 진해여고, 진해고교의 데모
3. 17 ~ 22 마산에서는 전 중고교생들 등교 중지명령이 내렸고
3. 24 부산고교생들의 데모, 휴교령이 내려진다
4.  6 서울 민주당의 3.15선거 무효선언과 시민들의 가세로 온 시내가 데모로 들끓었다
4.  8 부산 민주당에서 출발한 데모가 시내로 확산
      마산사건 책임자 찾아내라
      3.15 부정선거 불법이다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가 주요구호였다.

③ 마산의 2차데모
1960. 4. 11 오전 11시25분경 김주열군(17세) 시체가 마산앞바다에서 낚시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김주열군은 남원출신으로 고등학교 진학 차 마산에 왔다가 1차 마산데모시에 행방불명되었던 학생으로서 왼쪽 눈에서 뒷통수까지 길이 20cm가량의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이를 목격한 시민들은 분보하여 13일까지 온 시내를 흔들어 놓았으며 마산경찰서, 남성동파출소, 북마산파출소, 오동동 파출소등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④ 고대생들의 데모
고대신보의사설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지성인을 거부한다”에 학생들은 의식하면서 4.18 넷째시간이 끝나자 인촌동상앞에 집합하여
-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처벌하라!
-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3,000여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농성을 하고 있을때 유진오총장이 “이성을 회복하라”는 요지의 말씀을 듣고 귀교 도중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쪽에서 일백여명의 깡패들이 부삽, 몽동이, 갈고리, 벽돌등으로 학생들을 난타하다 학생들은 8시경 학교에 도착하여 데모를 마쳤다
이날 부산에 동래고, 청주의 청주공고, 대구고교생들의 데모도 있었다.

⑤ 4.19의 분노
서울대  4월 19일 9시 20분경 문리대를 출발한 선봉대가 법대, 미대, 수의대생들의 합세로 저지선을 뚫고 종로에 진출했다.
-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 민주주의 위한 학생데모 총칼로 저지 말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했다. 이날 서울대학교에 대모는 역사적인 4.19데모의 봉호를 올린 것이다
건국대  10시경 낙원동 교문을 나선 1,000여명은  “3.15선거를 다시하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외치며 중앙청 경무대 앞에 이르러 총탄을 맞아 유혈항거를 했다.
고려대  전일의 데모중에 깡패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인하여 유총장의 만류를 물리치고 시내로 진출하여 조선호텔, 동화백화점, 퇴계로5가, 종로5가를 거쳐 무사히 귀교했다. 학교에서 농성을 계속하면서 다음날 새벽 3시에 해산했다.
동국대  2천여 학생들은 국회의사당을 진출하여 중앙청 서문인 동의동파출소까지 진출하였으나, 최루탄에 이어 실탄발사로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성균관대  성균관대 학생들은 “정부통령 선거 다시하라”, “민족정기는 살아있다”, “3.15부정선거는 사상 최대 최악의 선거였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교문을 나서 광화문에 이르렀으나 서대문 이기붕 집으로 가서 공격하고 자유당 중앙당부로 몰려가 공격하고 4시경 귀교했다.
연세대  3,000여명 학생은 교문을 나서 서울역을 거쳐 안국동으로 해서 “3.15부정선거 규탄한다!”, “민주주의 반역자 극형에 처하라!”, “학도는 살아있다”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데모했다. 이 외에서 서울의 많은 대학들이 궐기를 하였으며 지방에서도 광주, 청주, 인천,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학생시민들이 데모를 하였다.

⑥ 대학교수단 데모
1960. 4. 25 서울대 의대 교수회관에 모인 교수들은 14개 항목으로 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쓴 현수막을 성대의 변희용 교수와 연대의 변오철교수가 높이 들자 고대의 이창영 교수, 연대의 정석해 교수 그리고 성대의 임창순 교수가 선두에서 출발하여 질서정연하게 종로에 이르렀다.
국회의사당에 도착한 교수단은 시국선언문을 이항녕교수가 낭독하고 정석해 교수의 선창으로 만세삼창으로 해산했다.
교수단의 데모는 많은 시민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으며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으로 제1공화국의 중말을 고했으며 이승만은 허정씨에게 과도내각을 위임했다.

Ⅳ 맺는 말
온갖 부정비리의 이승만 독재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궐기로 권력에서 물러냈지만 혁명의 주체는 없었다. 따라서 당시에 야당인 민주당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획득하게 되었지만 학생들과 국민이 바라는 만큼의 민주개혁은 이루지 못했다. 따라서 4월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며 혁명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4월혁명의 불씨는 고등학교 학생이 지폈으며, 혁명의 불꽃은 대학생들이 피웠고, 결실은 교수단이 맺었다. 4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로 일반 민중이 참여했고 둘째로 계엄군이 국민의 편이였다는 점이다. 4월 혁명의 정신은 민주주의의 창달이며 민족통일로 이어진다. 또 혁명의 언저리에서 목소리가 높지 않는 서민, 농민등의 삶의 문제를 읽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미완의 4월 혁명은 오늘날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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