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박찬수 칼럼] 인류멸망의 바로미터 이스터섬을 찾아2020-05-06 13:07
작성자 Level 10




이스터섬은 일생에서 한번 가기도 힘든 남미에서도 소수의 몇 여행자만이 들릴 수 있는 곳이다
. 칠레 본토에서 타고 5시간을 가야하고 그마저도 하루에 한편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본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물가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망설이게 한다. 때문에 선택받은 자만이 밟을 수 있는 미지의 섬이다.

15세기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한참 뒤인 1722년 네덜란드의 탐험가 J. 로게벤은 칠레에서 출발해 4주 동안 서쪽을 탐험한 끝에 이스터섬을 발견했다. 이날은 부활절(Easter Day)이라 그 이름이 그대로 섬 이름이 되었다.

이스터섬은 사람이 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숲이 무성하고 새들이 노니는 '열대의 낙원'이었다. 5세기경 1600이상 떨어진 섬에서 사람들 수십 명이 이주해 오면서 인간의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처음 인간들은 낙원 속에서 살았다. 이주민이 가져온 고구마는 덥고 습한 환경에서 거의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자랐으며 이스터섬 문명은 거의 1000년 이상 지속되었다. 최고 전성기였던 15세기에는 하루 이틀이면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섬의 인구가 약 15,000여명이나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이들 문명은 폴리네시아인과 잉카인들의 부족으로 나눠져 있었으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던 두 부족은 끝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은 모아이 석상 만들기 경쟁으로 번진다.

모아이 제작은 채석장에서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암반을 돌망치나 정으로 쪼아 하늘을 향해 누운 자세의 모아이를 조각한다. 완성이 되면 바위에서 모아이를 떼어 내기 직전에 모아이 등을 통나무를 대고 로프로 묶은 다음 산기슭의 경사를 이용해 미끄러뜨린다. 모아이는 통나무로 이동시켜 바닷가 제단에 모아이를 세워 올렸다.

모아이가 큰 것은 부족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점차 모아이를 더 크게 만드는 것에 대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수십 톤에 달하는 모아이 석상을 설치장소인 해안가로 옮기기 위해 무수한 나무가 베어져 레일로 쓰였고, 어느 순간 파국이 찾아왔다.

일단 숲이 사라지자 화산암이 오랜 세월 동안 풍화 작용을 거쳐서 마련된 기름진 겉흙은 급속히 사라졌다.

겉흙이 사라진 밭에서 고구마가 자라지 않자, 섬사람은 더 많은 숲을 밭으로 만들었다. 물론 그 밭도 얼마 안 돼 겉흙이 사라진 불모지로 변했다. , , 밭이 차례로 파괴되는 악순환이 몇 차례 반복되자, 섬사람은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자 섬의 새들을 잡아먹었다. 섬의 겉흙을 다시 기름지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구아노(새똥)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나무가 없다는 것은 바다에 뜰 배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람들의 단백질 보충원인 낚시와 고래사냥이 불가능해졌다.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생존에 대한 본성이 우선이었다. 부족 간의 전쟁은 서로를 살육하며 식인을 하는 아비규환의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이스터 섬의 1000년 이상 지속되던 문명은 한 세기만에 몰락했으며 15000명에 달했던 인구가 J.로게벤이 상륙했을 때에는 50명만 남았다. 

섬사람들은 마지막 야자나무가 베어졌을 그 순간에도 치명적 미래를 자각했을까? 사람들은 언제든 섬의 자연환경이 복구되거나 다른 살아갈 방법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희망을 걸었을 것이다. 과도한 개발과 무차별적 자원의 착취, 인간중심의 문화와 사고방식으로 인해 눈에 띄게 지구가 메말라 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스터 섬은 지구 멸망의 바로미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수 회원 치악초 교사 pcsdrea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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