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세균칼럼]압록강,백두산, 두만강여행기2017-12-01 18:35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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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국 접경지역,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 여행기

“역사는 살아있는 자들의 기록일 뿐이다.”

길터여행협동조합 사무국장 신세균(누리)  wjsksin@hanmail.net

  청소년여행학교 길배움터(이하 길터)의 첫 해외여행은 민족의 정기가 서려 있는 백두산과 독립 운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간도 지역을 택했다. 길터의 모든 여행은 공정여행 컨셉으로 진행된다. 첫째, 일회용품 사용을 가능한 자제하고(개인 물병, 손수건, 개인 수저젓가락 사용) 둘째, 가급적이면 대규모 체인점을 이용하지 않고 셋째, 현지인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넷째, 되도록 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현지인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숙박시설과 식당을 찾아다녔다.

  주요 여행지는 압록강변 따라 단동(신의주), 수풍(삭주), 집안(만포), 림강(중강진), 장백(혜산)을 지나 장백산(백두산)을 등반하고 두만강변의 삼합(회령), 도문(남양)을 거쳐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과 연길이다. 이중에서 압록강변의 호산산성과 백두산 그리고 항일무장 투쟁의 고향인 명동마을을 소개하겠다.  

  만리장성종단기점 호산산성은 동북공정의 역사현장이다.
  단동 시내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호산산성은 중국정부가 복원한 압록강변의 산 능선을 따라 축성하였다. ‘만리장성종단기점’이라는 표지판을 보면 만리장성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근거가 미약한)주장을 하며 이를 공인하여 명문화하였다.  이 역시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여기 호산산성은 그런 중국의 야욕을 보여주고 있는 동북공정의 역사현장이다. 
  호산산성에 바라본 북한을 가까이 가기위해 압록강 보트에 탑승하였다. 압록강의 너비는 생각보다 컸다. 지척에서 북한을 바라볼 때는 가슴이 조금 벅차올랐다. 6인용 보트 가격은 한화 9만원이었다. 보트가 북한쪽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북한군에게 보트 운전수(한족)는 북한의 고급담배 ‘길’을 한 보루 던져주었다. 북한군은 미동도 없이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 북한군은 통행료를 지불하는 보트 운전수에게 “지금은 조선이 가난하지만 중국보다는 자존심이 강한 나라”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또 하나의 조국이 “참으로 서글프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트에서 바라본 단동시내는 또다시 마음을 불편케 했다. 단동은 한산한 북한 쪽과는 대조적으로 높은 빌딩과 아파트가 즐비하다. 단동 경제의 중심은 「조중무역」이라고 한다. 단동에는 중국정부가 운영하는 무역회사 말고도 많은 민간 무역회사가 있어 북한과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상당한 규모의 경제적 교류를 하고 있다. 남한정부가 북한에 대해 이념공세에 몰두하고 있을 때 북한과 중국은 실용적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백 명이 가서 두 명만 볼 수 있다는 백두산, 세상에 이럴 수가!
  
  중국여행을 몇 번 다녀왔지만 백두산에 가 볼 기회가 없었다. 백두산에 올라가 천지를 본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조금 벅차올랐다. 아침식사를 하고 장백산(백두산) 입구 매표소까지 날씨는 구름만 조금 낀 날씨로 꽤 좋았다. 티켓팅 후 환경보호차량을 탑승하고 천지로 가는 길에 버스창문에 맺힌 빗방울이 보인다. 백두산은 ‘백 명이 가서 두 명만 볼 수 있다’는 낭설이 떠오른다. 우비를 입고 1,400개의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니 숨이 턱에 차올랐다. 정상에 올라서니 짙은 안개로 천지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면서 짙푸른 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세상에 이럴 수가! 천지를 볼 수 있었던 행운은 가슴 벅찬 일이었고 잊지 못할 사건이 되었다. 천지에서 20분이 지났을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먹구름과 안개가 몰려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곧 바로 짐을 챙겨 내려왔다. 이렇게 백두산의 기후는 수시로 변하고 있었다. 

  용정은 가는 곳마다 우리의 역사현장이다. 
  백두산 송강하에서 기차로 5시간 걸려 용정에 도착했다. 용정은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이 흐르고 항일교육의 요람이었던 명동학교가 있다. 명동학교는 통일할아버지 문익환과 저항시인 윤동주 그리고 청년문사 송몽규가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모교이다. 그 곳 교실에서 윤동주 서시를 낭독하는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기분이 묘했다. 명동학교에 이어 명동교회, 윤동주와 송몽규 생가, 김약연묘비 등 명동촌 송길련 촌장님께서 손수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명동촌을 떠나 윤동주와 송몽규 묘소를 찾았다. 윤동주 묘소가 용정에 있건만 용정 주민들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고 바닥의 요철이 심해서 일반 패키지여행자는 찾지도 않는다고 한다. 묘소 입구에는 초라해 보이는 플라스틱 이정표가 철골구조물(아시바)에 매달려 있다.
  용정은 가는 곳마다 우리의 역사현장이다. 유적지 마다 관리는 허술하다. 흔적도 없는 곳도 많다. 간도역사에 대한 연구도 일본이 앞장섰고 지금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울 뿐이다. 그동안 한국은 무엇을 하였나. 남의 눈을 빌어서 자신을 해석하는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닐까. 

  12일간 여행하면서 문익환 평전을 읽었다. 예전에 어설프게 알고 있던 문익환 목사님과 간도역사가 새롭게 다가왔다. 살고 있는 땅을 떠나 옛 조상들의 땅을 일구어 명동촌을 하나의 공동체로 세워 민족교육 더 나아가 항일 광복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 삶을 알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역사는 살아있는 자들의 기록이기에. 평전에 그려진 명동촌은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번 여행은 문익환 목사님과의 만남이었다. 보고 싶다! 평전에서 다가왔던 한 구절로 여행기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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