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진상칼럼]내가 겪은 518, 35년만에 진실을 말하다2017-12-01 18:39
작성자 Level 10

“광주민중항쟁 생존자 이진상 교무님 35년 만에 말문을 여시다”

    이진상 원불교 원주교당 교무/615강원본부 공동대표  juragy2@naver.com
    대화: 서재일목사님 6.15강원본부 상임대표
    기록: 이주현 원주시민연대 사무차장

본 글은 지난 5월 14일 오후7시 한지테마파크에서 우리단체와 6.15강원본부가 공동주최한 518 35주년 기념 이진상교무님 강연회에서 소개된 내용을 싣는다. 
  
1980년 5월 17일 당시 전북의 지방공대 4학년 여학생이었던 저는 전남대학교 신문사와의 미팅이 있어 장성을 거쳐 전남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5.18을 겪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서울과 수도권지역에서는 대학생들의 민주화시위가 한창인 시절이었습니다. 저 또한 대학생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했었고 당시 여학생들이 앞장을 서면 진압이 곤란하여 시위대의 앞에 서보기도 하였습니다. 허나 광주로 향하였을 때는 그저 대학 간의 연대를 위한 사업을 위해 방문차 갔었을 뿐 그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5월 17일 저녁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금남로에 있던 원불교 교당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5월 18일 오전에 전남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금남로에서 광주역을 지나 전남대까지 걸어가는 길에 광주역쯤 도착하였을까 햇살이 쨍쨍 내리쬐고 며칠 있으면 열릴 부처님오신 날 행사로 거리에는 오색 연등이 길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길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3,4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 잠시 길을 멈추고 길 건너에서 구경하고 있었지요. 대학생 수가 조금씩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전경과 또 전경과 구별되는 검정베레모 쓴 이들과 그 뒤로 무언가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검정색 두꺼운 잠바를 입고 철망으로 된 검정색 투구 비슷한 것을 머리에 쓴 시위대 보다 수십 배는 더 되는 인원들이 시위대를 둘러싸고 점차 거리를 좁혀 가고 있었습니다. 시위대가 들고 있는 것이라고는 ‘신군부철폐’, ‘계엄령해제’ 등을 붉게 적은 천막과 수건들 뿐 이었지요. 한 시간쯤 지났을까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나더니 시위대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무척 단단해 보이는 목봉을 들고 시위대로 달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여학생이고 남학생이고 할 것 없이, 길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까지도 그들에게 잡히는 대로 머리가 터져 나갔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때릴 수 있을까.. 생각도 할 새가 없었습니다. 말 그대로 무차별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광주역 앞의 그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들로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정신없이 달리다가 셔터가 내려진 가게 앞을 지날 때 셔터가 3분의1쯤 열리더니 아주머니께서 어서 들어오라고 하셔서 그 안에 숨어 있었습니다. 밖에는 셔터를 차는 소리가 몇 번 났었고 그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끌려가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너무나 무서워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혼비백산 한 하루가 저물고 같이 했던 일행과 길 한구석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이런 믿지 못할 일에 분노하며 다시 전남대로 향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길에는 핏자국들과 미처 신고 가지 못한 신발들이 널려 있었고 자식 같은 학생들이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맞았다는 소식을 보고 들은 광주시민들이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광주역 앞 금남로에는 어제까지는 볼 수 없었던 시내버스들과 트럭들이 시위대를 보호하는 듯 거리 중간에 세워져 있었고 그 버스 벽들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군인들이 집결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다행이 어제 잡히지 않은 대학생들과 그들 뒤로 일반시민들이 모여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위대는 점점 불어났고 그들은 조금씩 앞으로 행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일행도 시위대에 자연스럽게 합류하여 앞으로 행진하였습니다.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던 군인들은 가지고 있던 총에 번쩍이는 칼을 꼽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후 두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피~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시위대의 앞쪽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군인이 총을 쐈다. 모두 엎드려라” 하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 군인들이 모두 엎드려 쏴 자세를 하고 있었고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던 사람들이 수수대 쓰러지듯 우르르 쓰러졌습니다. 일행을 챙길 새도 없이 또다시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설마 대한민국 군인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총을 쏜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총소리는 영화에서처럼 ‘탕탕’하며 나지 않았습니다. 피익~하는 소리에 옆 사람이 쓰러지고 저는 계속 달렸습니다. 어딘지도 모를 한 골목길 구석 쓰레기통 뒤에 겨우 숨었을 때 그 골목으로 만삭의 임산부가 3살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손에 잡고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뒤를 군인 서너명이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더니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채 끌고 갔습니다. 아이엄마는 놀래 소리를 지르며 따라갔고 아이의 발목을 잡는가 싶더니 군인들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지고 아이도 엄마 옆으로 던져 졌습니다. 군인이 다가가 총에 꼽힌 칼로 아이엄마의 만삭인 배를 툭툭 쳤습니다. 그리고 아이엄마의 젖가슴 쪽의 옷을 칼로 풀어헤치며 희롱하던 차에 그 옆의 대문에서 할머니 한분이 나오셔서 내 새끼들 가만히 놔두라며 소리를 지르셨고 그 군인은 할머니를 발로차고 다시 아이엄마에게로가 총검으로 왼쪽가슴을 푹 찔렀습니다. 그리고 다시 칼을 뽑아냈을 때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 피분수를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아이엄마가 폭도였나요? 빨갱이였나요? 저는 다 봤습니다. 소리도 지를 수 없었고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저는 다 봤습니다. 저는 당시의 이야기들을 어디서도 꺼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길에 널려 있는 시체들과 시체를 군용트럭에 던져 넣는 군인들... 저는 35년이 지난 지금도 밤에 불을 끄지 못합니다. 귀에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1년 365일 이어폰을 끼고 다닙니다. 너무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기 때문에 저는 5.18이야기가 나오면 저는 대화를 피하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의 자리에는 언저리에라도 참가를 하게 되더군요. 도망치고 싶다, 무섭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한열 열사 때도, 6.10민주항쟁 때도 항상 그 자리마다 저도 모르게 그 현장에 가 있었습니다.

작년, 그러니까 2014년 어느 날, 한 다섯 분정도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5.18 이야기가 나오길래 저도 모르게 입을 닫고 그저 듣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 어느 분이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이야” 라며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당한사람이요”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광주와 원주가 멀다고 하지만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지, 그때부터 생각해 오던 일을 오늘날에 와서야 하게 되는군요. 제가 계속 도망다니고 입을 닫고 있다면 그때 죽은 아이엄마가 저에게 무어라고 할까요? 혹자는 북한군 600명이 침투해 저지른 일이다라고 합니다. 개똥같은 소리입니다. 애 끌고 가는 임신한 간첩 봤나요? 
저 또한 대한민국 전라북도에서 태어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면서 대한민국 여권을 가지고 다닙니다. 저는 종교인이고 원불교 원주교당 교무로 활동하며 이제 환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간첩인가요?

오늘 이 자리를 통해 35년만에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저에게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기로 합니다. 그때 희생되신 분들에게 같이 죽지 못해 미안했다고 지금부터라도 당신들을 증명하며 살겠다고, 우리 후손들에게 당신들이 있었음을 기억시키겠다고 그래서 대한민국이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이루는 날 당신들을 떳떳하게 만나겠다고 다시 다짐합니다. 5.18민중항쟁을 기억하고자 노력하시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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