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민종덕칼럼]전태일과 이소선어머니 그리고 나2017-12-01 18:54
작성자 Level 10

전태일과 이소선어머니, 그리고 나

민종덕 전태일의 친구, 전 청계피복노동조합 위원장, crsl100@hanmail.net

1. 어린 시절

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에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과정을 거치는 중 1960년 말 가족의 이농으로 서울로 상경했다. 60년대 말 전형적인 이농대열에 끼어 도시로 유입된 가족이다. 
이 시기는 산업화 초기로 자본의 이동이 토지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이동함으로써 농촌이 몰락하고 농촌인구는 도시로 몰려들어 산업예비군이 되었다.  이는 저곡가 정책과 맞물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을 가능하게 한 토양이 되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특별할 것도 없고, 특출 난 재주도 없는 나는 그저 그런 아이였다. 다만, 내가 태어난 고향이 다름 아닌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곳이어서 어려서부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1961년 군사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자신의 쿠테타를 혁명으로 미화시키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이용하기 위해 박정희 의장 시절에 황토현에 동학농민 기념탑을 세우고 거기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이 황토현 동학농민 기념탑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기 때문에 매우 관심이 높았다. 그런데 동학농민 기념행사가 관주도의 행하사가 됨으로써 동학농민 정신에 반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목격하고 반감을 가지기도 했다. 어쩌면 나의 저항의식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 ‘큰뜻’이란 무엇인가 고민도 했었다.      

2. 상경

저곡가 정책으로 말미암아 농사를 지어봤자 늘 손해였기 때문에 우리 집은 그리 많지 않은 논과 밭을 해마다 야금야금 팔아가면서 생계를 이어가다 그 사이에 성장한 형들부터 한명씩 서울로 올라가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내가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 전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했다. 처음 우리 가족이 이사한 곳은 미아리 삼양동 빈민촌이었다. 형제들은 직장이 있는 곳에서 기숙을 하면서 가끔씩 집에 들르는 생활이었다. 그러다가 당시에는 시골이나 다름없는 목동으로 이사를 했다. 

3. 방황

서울에 올라와 학교를 계속 다니기 위해 미아리고개에 있는 학교를 찾아 들어갔다. 그러다가 목동으로 이사는 바람에 너무 멀어서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다. 대신 공장에 들어갔다. 제본소, 보석가공 공장을 전전했다. 공장을 다니면서도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었으나 어려웠다. 그래서 책을 읽기로 했다. 이 시절 헌 책방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1974년 경 서울 청계천 헌 책방에 들렀다가 헌 잡지 ‘신동아’에 전태일의 일기를 소개한 것을 보았다. 1971년 1월호에 ‘최소한의 요구’라는 전태일 일기가 실렸고, 4월호에는 ‘그 후의 평화시장’이라는 르포기사가 있었다. 이 책을 구입해서 읽고 전태일한테 감동을 받았다. 
내가 당시 전태일한테 감동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에 남다른 공감을 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어떻게든지 현실을 개선하고 인간답게 살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 나와 다른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공장생활을 하면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특히 임금체불이 많았었는데 체불임금을 받으러 갈 때 면 사장님들의 그 싸늘한 시선과 교활함에 한없이 울기도 했다. 그들의 수법은 ‘다음에 오라’면서 결국은 포기하도록 했다. 당시에는 노동청에 가서 진정하는 것도 몰랐다.  
나는 곧바로 잡지에 적혀있는 전태일의 집 주소(서울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를 들고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갔다. 
내가 이소선 어머니를 찾아갈 때 빵모자를 쓰고 갔었다. 내가 당시 빵모자를 쓴 이유는 장발 단속에 걸려 머리 한쪽을 뜯겨서 였다. 당시에는 반항 심리로 머리를 깎지 않고 뜯긴 부분만 가리기 위해 빵모자를 쓰고 다녔다. 이런 이유로 이소선 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빵모자’라고 불렀다.  이소선 어머니를 찾은 나는 ‘전태일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말씀드렸다. 이소선 어머니는 왠 낮선 사람이 찾아왔으니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 후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취직을 했다.  

4. 전태일을 만나다

평화시장 봉제공장 시다로 취직한 나는 시다 일을 하기에는 나이가 많고 더구나 남자여서 시다로 일을 하다가 시아게사 일을 하기도 하고 재단을 배우기 위해서 재단보조로 일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을 하는 동안 전태일의 죽음으로 설립된 청계피복노조 간부와 교류를 가지면서 노동조합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때 근로기준법,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  무엇보다도 전태일에 관한 공부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태일의 일기나 수기 등은 당시에는 몰래 돌려보는 정도였다. 전태일 일기를 등사기로 밀어서 만든 소책자가 있었는데 등사가 잘 못 되어 제대로 읽어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을 입수해서 일기도 했고, 전태일 일기를 요약해서 만든 조잡한 소책자를 돌려 읽기도 했었다. 당시 분위기는 전태일 일기나 사진을 불온시하는 분위기였다. 
전태일을 알면 알수록 그 인간애에 깊이 감동하고 그처럼 실천해야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5.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한 36년

이소선 어머니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때는 1975년 11월부터다. 청계피복노조는 매년 11월 초에 지부장컵 쟁탈 등산대회가 있었는데 그해 등산대회에 참가한 나를 이소선 어머니께서 조용히 불러서 행사가 끝나면 창신동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래서 이날 저녁 만나서 시민아파트인 낙산아파트에 갔더니 청계노조 조합원 여럿이 모였다. 이날 모임은 집행부 몰래 조합원들이 모인 것이다. 당시 집행부는 한국노총에서 파견한 간부들의 영향을 받아 현실에 타협하고 노동조합을 관료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정이 공작한 결과임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래서 이소선 어머니를 중심으로 중견조합원들이 모여 바람직한 노동조합운동을 벌이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 전태일 5주기 추모의 밤을 어떻게 개최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이날 ‘전태일 5주기 추모위원회’가 결성이 되고 나는 기획. 홍보 역할을 맡았다. 
추모위원회는 전태일 5주기 추모의 밤을 현장노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질적인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행사로 치렀다.  이 일로 집행부와 이소선 어머니와 갈등이 심화되었다. 
추모위원회는 이어 12월 24일 시간단축 투쟁을 감행하고 청계천 노동자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인 하루 14-16시간 노동시간을 하루 10시간으로 단축하는 것을 쟁취했다. 이 투쟁은 청계피복노조로서 가장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즉 조합원 대중의 요구를 담아 조합원과 함께 투쟁을 통해서 근로조건을 개선한 것이다. 이로 인해 대중성 투쟁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해치려는 음모를 투쟁을 통해 물리친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이 신진세력은 다음해인 1976년 봄 임금인상 투쟁도 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투쟁을 회피한 집행부는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전투적인 새로운 집행부가 들어서고,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교실 실장으로 선출되었다. 청계노조는 노동교실을 통해 조합원을 의식화 시키고, 투쟁을 조직하고, 여타 노조와 연대하는 활동을 가열 차게 전개 했다. 이에 당국에서는 1977년 7월 노동교실을 폐쇄하고 이소선 어머니를 구속시켰다. 이때 나와 청계 조합원들은 목숨을 건 투쟁을 통해 이소선 어머니와 노동교실을 사수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노동운동을 탄압한 유신정권은 79년 10.26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했다. 서울의 봄 시기에 이소선 어머니는 전국의 노동현장, 대학교를 누비면서 실질적인 민주화를 외쳤다. 그러나 80년 5월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은 군화발로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을 짓밟았다. 청계피복 노조는 81년 강제해산 당하고 이소선 어머니는 구속이 되었다. 
청계피복노조는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나 마침내 1984년 노동조합을 복구했다. 나는 복구된 노조 위원장이 되었다. 이소선 어머니 역시 또 다시 청계피복노조로 돌아와 전두환 정권과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복구된 청계피복노조는 노.학 연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전두환 정권에 타격을 주었다. 
노동자들은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 이후 7,8,9월 대투쟁을 통해 계급적 승리를 쟁취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단위의 자주적인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출현하기도 했다. 이 역사적 중심에 이소선 어머니께서 늘 함께 하셨다. 
이소선 어머니는 민주화운동 민중생존권 운동을 하다 죽어간 가족들을 조직해 민족민주유가족 협의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셨다.
이소선 어머니는 2011년 7월 심장 이상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곳 어디라도 늘 함께 하심으로써 아들 전태일이 숨을 거두면서 당부했던 내가 못다 이룬 뜻 어머니가 대신 이루어 달라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다 사랑하는 아들 곁으로 2011년 9월 3일 가셨다.
나는 그동안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이소선 어머니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1990년 이소선 어머니로부터 구술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자료를 모으고 취재를 해서 2014년부터 이소선 평전을 집필하기 시작해 2016년 9월 3일 이소선 어머니 5주기를 맞이해 <노동자의 어머니 - 이소선 평전>을 출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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