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황경재컬럼]학생인권의 오늘과 내일2017-12-01 19:06
작성자 Level 10

  학생인권의 오늘과 내일

  황경재 교사, 회원, 강원학교인권교육연구회 회장 kjkj9434@naver.com
  
  ‘학생인권조례’라는 말이 전국적으로 울려 퍼진지도 어느 새 10년이 되어 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학생인권’이라는 측면에서 학교는 조례가 통과했다고, 혹은 하지 않았다 고해서 눈에 띄는 큰 변화는 찾기가 힘들어 보인다. 인권조례가 통과한 서울, 경기, 전북, 광주 지역도 여전히 학생 인권 증진을 위해 이를 반대하는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인권’이라는 말을 들으면 ‘인간의 소중한, 고귀한 권리’,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 ‘인간을 마지막까지 지켜주는 고귀한 수단’이라는 말로 다양하게 정의를 내린다. 분명 인권이 백익무해(百益無害)한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를 옹호하고 실천하는 것에는 상당히 주저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주저함의 원인은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소수자라는 말이 꽤나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소수자(小數者)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적은 수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해석이며, 실제로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은 경험이나 특징을 지니고 있어 이로 인해 차별을 겪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집단‘을 일컫는다. 
  학생들은 숫자로 따지면 초, 중, 고를 합해 수백만 명이나 되지만 엄연히 소수자의 범주에 속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인권 침해를 겪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학생’이라는 차별적 특징은 그들이 성인으로부터 미성숙하다고 평가받는 근거가 된다. 요즘은 드물지만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교육적 목적의 체벌을 경험하였으며, 자신의 머리를 마음대로 깍지도 못했다. 명찰을 달지 않았다고 교무실에 불리어 갔으며, 공손하게 대답하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들어야했다. 원치 않는 자율학습에 강제로 참가를 강요당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너를 위한거야’라는 말로서 끊임없는 가짜 설득을 권유받았다.
  슬픈 학생의 처지를 공감해주는 교사, 청소년단체 활동가, 인권운동가 등도 학생들 처지나 별반 다름이 없다. 그들을 학생을, 학생의 인권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자고 하면 다들 공감은 하는 척 하지만 아직 학생 인권이란 시기상조라는 말로, 괜히 그리 됐다가는 학생들이 날뛰어 학교가 붕괴된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반대를 일삼아 왔다. 심지어 학생 편에 서서 인기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보수언론에서는 학생인권을 보장하면 그렇지 않아도 추락한 교권의 심각한 위기가 예상된다며, 아니 확실하다며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쉼 없이 날리며 갈등을 조장키도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한다. 국민들을 학생으로 바꿔 대입해보자. ‘학생은 학생으로의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헌법이 최상위 법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우리는 최우선적으로 헌법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한다. 학칙으로 또는 말뿐인 생활규정으로 학생의 소중한 권리를 제한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그들을 인간으로서 대접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고, 그동안 미진한 부분은 없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왜 교문을 넘는 순간 학생들의 인권은 고개를 숙여야 하는가. 학교의 목표는 좋은 대학을 보내고 학생이 영어와 수학에 능통해서 글로벌 인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사회를 잘 살아갈 수 있는 민주시민을 키워내는 것이 학교의 목표,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남을 아픔과 슬픔을 공감하는 것보다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공동의 가치를 실천해가는 것이 One-stop으로 이루어지는 명령하달식의 의사소통 체계를 습득하는 것보다 이롭지 않다. 
  정권을 교체해낸 촛불의 힘은 위대하고 찬란했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에 전 세계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폭력 없이 이루어낸 정권교체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우리에게 아직 저력이 있음을 확인하곤 자랑스러워했다. 이러한 긍지를 바탕으로 온 사회에 촛불의 정신이 가득차길 바래본다. 내가 속해 있는 학교라는 조직에도 이 촛불의 정신이 스며들길, 아니 가득하길 진심으로 희망한다. 대한민국의 미래인,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새로운 동량들이 학교를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닫고 실천한다면 21세기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없이 밝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건의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에이 그럴 수도 있지. 요즘에는 그런 일 잘 없는데”라고 반응할 것이 아니라 “아니 어떻게 아직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다음에는 그런 일이 절대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하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사춘기 소녀처럼 풍부해지는 사회가 되도록 학교는 목표로 해야 한다. 
  “200년 전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고, 100년 전 여성의 선거권을 말하면 교도소로 보냈으며. 50년 전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 취급을 받았다는 장하준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단기적으로 보면 불가능해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는 계속 발전한다.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우리가 속한 조직, 사회 속에서 미진한 점을 찾고 그것을 개선하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한다. 변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매진할 때 더디지만 분명 이 사회는 좀 더 사람이 살만한 세상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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