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철칼럼]어둠을 넘어 분단에서 통일로2017-12-01 19:03
작성자 Level 10

이 철
-1975년 재일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
-13년간 억울한 옥살이
-2016 재심 무죄선고
-댜큐영화 자백출연

여기 원주는 지학순주교님이 계셨던 곳이고, 또 존경하는 이창복선생님이 계시는 곳이라. 그전부터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곳인데, 이번에 저를 불러 주셔서 이렇게 방문할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국민의 힘으로 박근혜와 김기춘도 구속되고 새로운 민주정권이 수립 되었습니다. 저는 40년전에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구속되어 생각치도 못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한사람으로서, 살아서 이런 날을 맞이하니 참으로 기쁘고 또 감게무량합니다.  

저는 일본에서 모국유학을 와서 학교를 다니다가 박정희군사독재가 한창이던 1975년12월에 당시 중앙정보부에 구속되어, 1,2,3심 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79년8월에 무기징역, 81년에 20년형으로 감형되어 88년10월, 개천절 특사로 13년만에 출소한 사람입니다. 

저는 일본 규슈지방의 구마모토란 데서 태어나서 자랐고, 현재는 오사카에서 살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약60만명의 재일동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약 15만명 정도가  오사카에서 살고 있고, 동경에 약5만명이 있으니, 오사카에 얼마나 많은 교포들이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작년에 한지 문화제를 개최하실 때 오사카에 오신 분들도 많이 계셔서 아시겠습니다만, 일본에 사는 우리들한테는 오사카가 서울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저는 아무죄도 없이 감옥살이를 13년, 그뒤 일본으로 강제 추방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귀양살이 13년, 합해서 26년을 탄압받으며 살아 온 샘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구마모토지방 민단 조직의 창설자의 한 사람으로서 토목회사를 운영하시면서 제가 어릴 때부터 민단활동을 열심히 해 오셨고, 조국을 그리워 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옛날에 한국에서 홍수가 나거나, 태풍의 피해가 심대할 때 민단을 통하여 많은 기부도 하셨댔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표창까지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북한이나 김일성에 대해서는 엄청 싫어하셨습니다. 
그 반면, 안중근의사는 얼마나 존경하셨는지, 나이 어린 저희들 6남매를 다다미방에 무릎을 끓고 일렬로 않혀 놓고 안중근의사와 부인, 아드님들의 사진을 무릎 앞에 펼쳐 놓고, 한장 한장 설명하시곤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날인지는 모릅니다만, 해마다 한번은 안의사와 가족 사진을 보는 날이 있었습니다. 

저희 남매들은 어린 나위에 부모님을 따라서 민단 사무실에 자주 가서 놀기도 하고, 뜻도 모르면서 어른들을 따라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 하며, 애국가를 부른 기억도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아버지밑에서 막연한 반공의식을 가진 청소년으로 자라다가 67년도에 동경으로 올라가서 동경의 중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저희 학교에는 당시 코리아문화연구회라는, 학교에서는 유일한 동포써클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대학에는 140명정도의 교포학생들이 있었는데, 그 중 많은 학생들이 그 써클 방을 출입하였습니다. 그래서 코리아문화연구회 안에는 민단계와 조총련계 학생들이 섞여 있었고, 정치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대립할 때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코리아문화연구회에 출입하게 된 것이 저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나아가서는 모국유학, 그리고 감옥살이까지 연결될 줄은 그 당시는 미쳐 알지도 못했습니다. 

막연한 민족의식과 반공의식만 가지고 있던 저에게 코리아문현을 통하여 알게 된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운동 이야기나, 625전생, 그리고 당시 사회주의 정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북한사회의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 때까지 민족적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고민해 오던 저의 가슴에는 뜨거운 뭔가를 심어주는 이야기로 와 닿았고, 당시 수천, 수만의 동포들이 귀국선을 타고 북한을 향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것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 일본의 대학가와 사회에서는 10년마다 갱신해야 할70년 미일 안부조약의 연장에 반대하는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되고 있어서 대학생들은 반미운동이나,  ML주의,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고, 열띤 토론들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민단을 통하여 재일동포들 자녀들을 한국에 유학시켜서 배우게 하는 모국유학의 길이 열리면서 일본에서 반쪽바리로 자라는 아들, 딸들을 걱정하시던 많은 1세 부모님들이 아들 딸들에게 우리말을 배우게 하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한국 유학길로 자녀들을 서로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남나라에 가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자녀들을 낳고 키워 오신 1세들은 자기들이 이루지 못했던 배움의 길을 자기 자녀들한테 열어 주면서 자기들의 간절한 꿈을 아들 딸에게 의탁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73년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서 석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12월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저를 간첩으로 만들기를 작정하였었고, 저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고문과 협박을 가하여 저를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제가 어떻게 간첩으로 만들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영화[자백]이나, [그것이 알고 싶다]등의 영상에도 조금 나와 있으니, 아직 못보신 분들은 유튜브를 검색하셔서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들이 간첩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작심하여 덤비고 고문을 가하면 벗어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은 고문과 날조로 사건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이고, 저희들은 순진하기만 한 어리석은 교포학생들이니, 어떤 결과가 나는지, 뻔한 일이었입니다. 

제가 75년12월에 알지도 못하는 괴한들한테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그날밤 충격을 받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저와 약혼녀는 한달 후에는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53세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그뒤 병을 얻어서 시름시름 않으시다가 4년뒤에 몸과 마음에서 기력이 쇠잔하시다가 56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제가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했다는 생각때문에 징역살이의 오랜 기간 동안 저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며 지낼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재판에서 1,2,3심 다 사형선고를 받았고, 저의 약혼녀도 1심에서 6년, 2심에서 3년6개월 형을 받고 만기 출소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었으니, 여기서 사형수들의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저에게는 강원도라고 하면 또 하나의 가슴 아픈 기억이 떠 오릅니다. 
그것은 74년도의 울릉도간첩사건과 79년도의 삼척사건으로 조작되어 희생되거나 고생하신 분들입니다. 

울릉도사건에서는 전영봉, 전영관, 김용득선생님, 3분이 사형집행 되셨고, 삼척사건에서는 진항식선생님과 김상회선생님이 사형집행 되셨습니다. 
그 두 사건은 사형수 아니라도 연류되어 희생되신 분들이 엄청 많은 큰 조작사건이었습니다. 
지난번에 서울에서 우연히 사형집행되신 김용득선생님의 아드님이고, 본인도 장기 징역을 살고 나오신 분을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제가 사형수로 3년6개월, 모두 13년을 살다 나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저보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하고 위로하시는데, 오히려 살아서 출소한 사형수가 사형집행 당한 사형수 가족한테 무슨 말을 건넬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2005년 815행사 장에서 사형집행된 인혁당 가족들을 만나 뵈었을 때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만, 그저 살아서 나온 것이 미안하게만 느껴져서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형수로서 집행되신 분 중에 또 한분, 잊지 못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김태렬선생님이라는 분입니다. 해방후 아마 몽양선생님 계통에서 활동하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 분한테는 가족이라고는 연세 많은 노모 한분 밖에 안계셨습니다. 그 어너니도 생활이 어려워서 아들 면회를 자주 못오셨는데, 김태열선생님은 노모에게 면회 대신 편지를 자주 써서 보내셨지요. 그런데 그 편지에는 언제나 [저의 편지가 배달 안되게 되면 제가 사형집행 된줄 알아 주십시오.]라고 쓰시곤 하셨습니다. 편지를 받아보는 노모의 가슴은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어느날 편지가 뚝 끊기면서 아들이 집행된 줄을 이해하게 된 어머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저는 이 어머님이 그 후 어떻게 되셨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아마 얼마 안되어서 아들 뒤를 따라 가시지 않았을까, 추측하였습니다. 
최근에 재심을 통하여 무죄선고를 받는 사례가 많이 나와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럽습니다만, 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채 역사의 뒷면에 묻혀 버린 이 분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울릉도사건과 삼척사건은 희생되신 분, 연류되신 분도 많고, 억울하기 짜기 없습니다만, 그러나 늦게나마 재심이 받아들여 져서 무죄판결을 받으셨으니 정말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저희들 재일돌포사건도 똑같이 억울하기 때문에 수년전부터 계속해서 재심을 제기하여 지금까지 28명의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1주일 전의 5월11일에도 전두환시절에 잡혀서 7년동안 고생한 재일교포 한 사람이 무죄선고를 받았지요. 저와 우리집 사람도 재작년말에 41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뻐해 주시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40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아보니, 기뻐할 것 같았던 내 마음이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형수로서 매일 매일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두려움, 문을 여는 소리만 나면 집행인가 하고, 순간 긴장한 기억들, 사형집행된 분들의 억울함과 그 가족들의 가슴찢어지는 절망감과 비통함. 잊을려고 해도 잊지 못할 이런 세월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라 와서, 재심 법정에서 형식적인 말로만의, 위로의 말도 하는지 마는지, 무죄를 선고한다고 한마디 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재판관들을 보니, [재판장님, 그렇게 쉽게 무죄 주지 마세요! 무죄선고가 너무 억울합니다!] 하고 한마디 소리 찌르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 것입니다. 
아까운 청춘도 감옥에서 다 보내고, 본인들뿐만 아니라, 가족, 친척의 생활마저 엉망으로 파괴되고 나락의 밑바닫으로 떨어지고 말았는데, 말 한마디로 그렇게 쉽게 무죄선고 준다면 선득 받을수 있겠습니까? 


이제 국민의 힘으로 박근혜도 김기춘도 구속되어 새로운 민주정권이 수립되면서 적폐청산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세월호도 3년만에 인양되어 304명의 젊은 생명을 앗아간 진상도 규명되어야지요. 
동시에 저희들은 재일동포들의 사건을 포함한 많은 간첩조작사건들의 진상 규명과 악의 세력들의 처벌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우리들 재일동포간첩단사건이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정권 하에서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던 김기춘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조작된 것이었으니, 이제 그들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선고되려고 하는 이 같은 시기에 맟추어서 저희들도 재심투쟁을 통해서 늦게나마 그들에게 한칼 내칠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감회가 남들은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런 집회에서는 한번도 안해 본 이야기인데, 원주에서 두번 다시 저를 불러 주실 것 같이 않아서 오늘 여기서 말했습니다. 이 때 교환된 저희들의 묵주는 그뒤 저의 집에 가지고 있다가 지금은 서대문구치소 역사박물관의 11사하3방, 재일동포들을 기념하는 방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창복선생님 전시방의 건넛방이니, 거기에 가실 기회가 있는 분은 들러 보시면 , 그 당시, 79년10/26에 박정희가 총맞아 죽었고, 서울의 봄이 오니 12, 12쿠데타로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탈취하고, 또 518광주민주항쟁등이 일어나는 등, 이 사회가 크게 요동치며 바뀌려고 있는 이 역사의 전환점에 아무것도 못하고 어두운 감방에 앉아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기 자신이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지요. 

저는 출소한 후 일본에서 살면서 같이 옥고를 치른 재일동포동지들하고 함께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라는 친묵모임을 가지고,  20년 이상 일본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해 왔습니다. 강연회와 음학회, 서예전과 사진전, 북한 어린이들의 식량돕기와 수해피해의 식량돕기. 615선언 5주년기념 평양대회, 또 2006년의 목포 광주 대회에도 참가하였습니다. 

저는 이번 촛불혁명을 통해 열린 새시대가 과거의 적폐 청산 뿐 아니라, 남북화해와 민족통일로 나가는 큰 전환점이 된 것임을 확신하며, 앞으로 615남북공동선언과 2007년10,4선언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더 약동적인 시대가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저희는 비롯 일본에서 살고는 있지만 작은 힘이나마 다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생각입니다. 
※ 본 글은 2017년 5월17일 영강교회에서 열린 518 37주년 원주강원기념행사 초정 강연회 강연을 기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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